빛나는 영광이
땅의 노래
솔숲 거닐며 흥덕왕릉 가는 길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먼저 가을 인사를 건넨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자란 나무들은 오래된 시간을 품은 듯하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자연스레 걸음을 늦추게 한다.부부가 함께 잠든 흥덕왕릉, 왕비 장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 흥덕왕의 이야기가 천년 소나무 숲에 고요히 남아있다.
글 임숙영 사진 박진형
✻ 안강 들판 끝에서 만나는 왕릉
신라 왕경을 벗어나 안강 들판 너머에 흥덕왕릉이 자리한다. 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빽빽한 소나무 숲이 먼저 맞아준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발걸음이 멈춘다. 곧게 하늘로 뻗은 나무보다 세월을 견디며 몸을 굽힌 나무가 더 많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란 듯하지만, 소나무들은 모두 왕릉을 향해 허리를 숙인 듯 서 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과 짙은 솔향이 어우러진 가을 들판은 걸음을 더욱 느리게 만든다. 흥덕왕릉은 왕릉보다 먼저 그 길이 마음에 남는 곳이다.
✻ 왕비를 평생 그리워한 왕
『삼국사기』 <흥덕왕 본기>에는 흥덕왕의 이야기가 전한다. 왕비 장화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고, 왕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신하들은 새 왕비를 맞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자고 여러 차례 권했지만, 왕은 끝내 뜻을 바꾸지 않았다.
“쌍쌍인 새도 자기의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하게도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재혼하지 않았고 시녀들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자신도 왕비 곁에 묻히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흥덕왕릉은 오늘날 신라 왕릉 가운데 대표적인 부부 합장릉으로 전해진다.

경주 흥덕왕릉 가는 길


경주 흥덕왕릉

경주 흥덕왕릉 십이지신상
✻ 신라 왕릉의 완성된 아름다움
흥덕왕릉은 통일신라 왕릉 가운데서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간직한 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두르고, 그 사이 탱석마다 갑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을 새겨 능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자리하고, 능 앞에는 신라인 문인석 한 쌍과 서역인 무인석 한 쌍이 나란히 서서 천년의 시간을 지키고 있다. 비석은 사라졌지만, 거북 모양의 귀부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릉 주변에서 ‘흥덕’ 명문 비석 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흥덕왕의 능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석물 하나하나에는 통일신라 왕릉 문화가 가장 성숙했던 시대의 조형미와 품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왕경 밖에 남겨진 특별한 왕릉
흥덕왕릉은 왕경 중심부가 아닌 안강 들판에 자리한 드문 신라 왕릉이다. 대부분의 왕릉이 경주 시내를 중심으로 조성된 것과 달리, 이곳은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풍경부터 사뭇 다르다. 들녘을 건너고 솔숲을 지나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봉분은 마치 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듯 고요하다. 왕릉을 향해 걷는 시간은 어느새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 된다.

✻ 차를 심고, 바닷길을 열다
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들여오고, 흥덕왕은 장보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해진을 설치했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바닷길을 넓혔지만, 나라 안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이 이어졌다. 왕은 사치 금지령을 내리며 민심을 돌보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안정시키려 애쓴 흔적이 기록 속에 남아있다.
✻ 천년의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
왕비를 먼저 떠나보낸 뒤 끝내 홀로 살았던 왕은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이의 곁에 잠들기를 바랐다고 한다. 문득 아름드리 소나무를 바라본다. 어느 하나 곧게 자란 나무가 없다. 긴 세월 동안 바람을 견디며 몸을 굽힌 모습은 어쩌면 왕이 견뎌야 했던 시간과도 닮았다.
흥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신라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이어졌고, 신라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흥덕왕릉에는 한 왕의 삶뿐 아니라 통일신라가 서서히 저물어가던 시대의 그림자도 함께 남아있다. 안개 낀 새벽이나 비 내리는 날이면 솔숲은 더욱 깊어진다.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솔숲은 가을 안개가 멋진 풍경을 그려내는 명소다.

경주 솔숲
✻ 깊은 솔향 따라 이어지는 길
흥덕왕릉으로 향하는 길은 그저 여느 왕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과 천년을 지켜온 돌의 위엄, 그리고 한 나라의 왕이 품었던 그리움이 한데 어우러져 가을 풍경 속에 조용히 스며 있다. 솔숲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걸음은 느려지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천년의 시간을 견딘 숲은 오늘도 왕릉을 감싸안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에도 오래도록 가을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