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경주
히스토리 경주 1
경주 낭산(狼山)
이야기
글 이채경 학예연구관(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사천왕사지
1968년 12월 13일 경주시 배반동, 보문동, 구황동에 걸쳐 있는 경주 낭산 일원이 갑자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63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무려 575필 909,854㎡나 되는 상당한 면적이었다.그 사연은 이렇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건설부에 낭산 전체를 대상으로 골프장 건설 허가를 신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부처 간 업무협의란 게 있어서 각 부처에 의견조회를 했었는데 문화재 관리의 주무 부처인 문화공보부에서는 산하의 문화재관리국에서 답변하도록 문서를 보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판단하고 우선 문화재위원회에 이 일을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문화재위원회에서는 당장 난리가 났다. 당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이 서울대학교의 김상기(金庠基, 1901~1977) 박사였는데 바로 노발대발하여 ‘아니 낭산이 어떤 산인데 거기에다가 골프장을 짓는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바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임시 지정을 의결하고 문화재관리국에는 신속히 현장 조사를 하여 지정자료를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직원 몇 사람을 긴급히 경주에 출장을 보내 사적 지정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서 다음 달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여 곧바로 사적 제163호로 지정하여 고시하고 건설부에는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었으므로 골프장 건설은 불가하다고 회신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지금은 고인이 된 두 분(손채호[孫埰鎬, 1933~2005] 전 경주시 학예사와 정재훈[鄭在鑂, 1938~2011] 전 문화재관리국장)에게 들은 공통의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다.낭산이 대체 어떤 산이기에 이토록 긴급하게 사적으로 지정하였을까? 경주 낭산은 해발 100m의 나지막한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산천조에 부(府)의 동쪽 9리에 있으며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 12년(413) 가을 8월에 [낭산(狼山)에서 구름이 일어났는데 바라보니 누각과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마땅히 이곳은 복 받은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였다]라고 하여 이때부터 신유림(神遊林)이라 불렀다. 또한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 8년(486) 8월도 기사에 [낭산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査閱)하였다]고 기록되었고, 선덕여왕 및 신문왕의 장지(葬地)와 관련해서도 나온다. 즉 선덕여왕을 낭산에, 신문왕을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또 열전에서 백결선생이 낭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는 낭산 남쪽에 선덕여왕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내력이 소개되어 있다. 같은 책 문무왕법민(文武王法敏)조에서는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하였다.
낭산과 주변에는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복사지, 황복사지 삼층석탑, 낭산 마애삼존보살좌상, 능지탑지, 만정사지 등 불교 유적과 선덕여왕릉, 전신문왕릉(효소왕릉), 전효공왕릉(문무왕비릉), 전진평왕릉(신문왕릉), 효성왕미완성폐릉 등 왕릉과 고분군, 고운 최치원 선생의 독서당 등 수많은 유적이 있다.

경주 낭산(狼山)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신라 초기의 오악이 존재한다.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을 비롯해 남악 남산, 북악 금강산, 중악 낭산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낭산이 중앙의 위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산의 중요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낭산(狼山)이라는 특이한 산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대체로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① 산의 모양이 이리가 엎드려 있거나 이리가 달리는 형상으로 보아서 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② 북반구의 겨울밤 동쪽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인 낭성(狼星, [천랑성(天狼星), 큰개자리의 으뜸별인 시리우스(Sirius)])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③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불설미륵대성불경>에 미륵불이 중생, 제자 등과 함께 도래해 오르는 산인 ‘낭적산(狼跡山)’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이곳에서 미륵불은 육만 억 년 동안 세상에 머물며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법안(法眼)을 얻게 한다. 이렇듯 낭산은 신라의 건국 사상과 이념이 불교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산이다.경주의 산악지형은 국토 수호의 방벽 역할을 했으며, 특히 신라 왕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낭산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산의 역할을 했다. 신라의 진호국가 도량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천왕사가 낭산의 남쪽에 있었으며, 왕실의 기복을 위한 원찰인 황복사는 산의 동북쪽에 있었다. 사천왕사와 황복사가 있었다는 점은 신라가 낭산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편적 근거이며 무엇보다도 진호국가의 이념과 산악신앙이 불력(佛力)의 가호 속에 있었던 신라 사회에서 낭산은 바로 왕실의 안녕과 기복을 위한 중심지였다. 낭산이 단순히 호법적인 성격에만 머물지 않고 산 자체가 신앙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됐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신라 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제정 2019.12.10.)에 의거하여 낭산 일원 및 사천왕사지 복원·정비사업이 신라 왕경 14개 핵심유적 복원, 정비 사업에 포함되어 본격 추진되고 있다. 우리 함께 낭산 일원과 그 주변의 문화유산들을 한번 둘러보자.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릉

신문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