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경주
히스토리 경주 2
조국의 불꽃으로 타오른 영웅들!
경주의 독립운동가를
다시 만나다
글 임숙영

오는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자존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들….
기록된 영웅도, 이름 없는 영웅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불꽃 같은 시간을 되새깁니다.
광복 80주년! 그들의 뜨거운 희생과 정신의 위대한 발자취를 기억해 봅니다.

“일제의 판사가 되느니, 독립운동가로 조국을 구하리라·”
박상진
(朴尙鎭, 1884. 12. 7.~1921. 8. 11.)
박상진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울산 남구 송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만 4세에 외동 석계리로 이주했다. 선생의 부친은 대한제국 시절 승지를 지냈고, 선생이 양자가 되어 모신 백부 시룡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가문에서 자랐다.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같은 해 국권피탈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자 이를 사임하였다. 1911년 망국의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난 선생은 중국 만주로 떠났고 허위의 형인 허겸, 손일민, 김동삼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중국은 신해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직접 목격한 그는 조국에도 반드시 혁명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박상진 의사는 1915년 7월 15일 풍기 광복단과 연계하여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을 조달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적시에 무력으로 최후의 복적(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는 창립 당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추대되었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본명 이진룡)가 선임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창립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남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되었고, 선생은 1918년 봄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향년 38세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주시는 순국 100주년 추모제를 열고, 선생의 묘소가 있는 내남면 노곡리 일대를 정비하는 등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효현교 우편마차 탈취사건, 알고 계십니까?
1915년 12월 14일 새벽, 경주 읍내를 출발한 우편마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마차에는 나라 곳간으로 들어갈 세금 8,700원이 실려 있었죠. 마차를 모는 이는 일본인 마부. 그 옆에는 중병을 앓는 조선인 환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발 큰 병원에 가게 저를 좀 태워주십시오.” 마부는 딱한 사정에 마지못해, 환자를 태워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목재다리인 효현교는 무너져 있었고, 마차는 개울길로 돌아가야 했지요.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느라 속도를 내지 못한 사이, 행낭을 찢고 돈다발과 함께 조선인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마부는 놀라 경주로 되돌아가 경찰에게 알렸고 1915년 12월 26일자 매일신보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세금마차에 탔던 가짜 환자는 독립운동가 권영만 의사, 효현교를 파손한 이는 백산 우재룡 의사이며, 이 모든 작전을 계획하고 지시한 이는 고헌 박상진 의사였습니다. 기민한 작전으로 빼앗은 8,700원(현재가 2억 5천만원 상당)의 세금은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전액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 경주시립극단은 ‘1915 경주 세금마차 사건’을 무대에 올렸고, 그날의 의기와 결의를 시민들에게 오롯이 전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다·”
최준
(崔浚, 1884. 7. 27.~1970. 10. 13.)
경주 출신의 최준 선생은 지역의 대지주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참여하며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의사와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이바지를 했다. 대한광복회가 일제에 발각되었을 때, 체포되기도 했던 그는 3·1독립운동 이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거액의 자금을 송금하며 지원을 이어갔다. 그가 안희제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가 1백여만 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에 이를 정도로 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다.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제출된 독립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는 등 독립 외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독립운동은 온전한 결심으로 완성된다·”
최완(崔浣, 1889. 2. 16.~1927. 1. 3.)
최완 선생은 경주 교동에서 태어났으며 최준 선생의 아우로 알려져 있다. 1909년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이시열,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지하 운동을 벌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제2회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시정부 조사원과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 참고로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경주시 출신 독립유공자 65명에 관련한 공훈 정보를 살펴볼 수 있다.